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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에게
    종이비행기 2020. 8. 10. 01:33

     

     

      몇 달 전 너의 생일에 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핸드폰을 보는데 숫자가 낯설면서도 익숙하더라. 잠시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문득 깨달았어. 나는 이런 느낌을 알림이 울리는 것 같다고 말해. 그 왜 아침에 일어나려고 시끄럽게 울리는 알림 있잖아. 아니면 미래의 내가 꼭 해야 하는 것을 잊지 않게 과거의 내가 설정해놓은 은근슬쩍 나타나는 알림일 수도 있고. 이런 알림은 내 핸드폰에 계속 둥둥 떠있어. 과거의 나도 끈질지게 화면에 붙박아 두지 않으면 내가 잊어버릴 걸 알았던 건지. 이번 건 후자에 가까웠어. 모닝콜처럼 ‘위잉위잉 우르르 쾅쾅’ 울려대면 몇 년 동안이나 만나지도 않은 그래서 챙겨본 적도 없는 너의 생일을 매년 기억한다는 건데 그건 너무 웃기잖아. 다만 나는 설정하고 싶지 않았던 알림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지. 두 개로 나뉜 내 한 쪽의 뇌에서 다른 쪽의 뇌를 쿡쿡 찌르는 것 같달까. 알고 싶지 않은데 내 호박이 혼자 설정해놔서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그런 거지. 
      아, 왜 내가 한쪽 뇌를 호박이라고 부르는지 말했었나? 우선 내 머릿속은 너도 알다시피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물리적으로 나뉜 건 아니야. CT를 찍어봤는데도 뇌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했어. 중학생 때였나 길을 걷는데 갑자기 전원이 꺼진 것처럼 힘이 쭉 빠진 적이 있어. 그러고는 마음이 텅 빈 느낌이 드는 거 있지. 친구들 이름은 기억이 나는데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했다는 건 알겠는데 왜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부모님을 보면 왠지 모르게 슬프거나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는데 그 감정이 무슨 일들을 거쳐서 축적되었고 그래서 발현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어. 나 없이 잘 굴러가고 있던 이 세상에 내 몸뚱어리만 갑자기 덜컥 던져진 것 같았어. 정신과 상담도 받아보고 엑스레이도 찍어봤지만 내가 느끼는 걸 그대로 표현하는 증상은 없었어. 나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기억들이 암흑에 파묻힌 것처럼 깜깜해져서 그런 기억을 다시 쌓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인생을 살아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아득한 기분이 들었던 거야.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감각들, 내 취향들 그게 어떻게 보면 내가 나일 수 있었던 것들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싹 다 지워져 버린 느낌이었어. 처음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몇 분 정도만에 다시 오이로 돌아와서 잠시 피곤했었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아. 
      오이라 부르는 부분이 내 주기억장치인 셈이야.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호박은 일종의 백업장치 같은 거랄까. 그렇지만 완벽히 백업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오이가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자리를 찾아서 반짝 들어오는 것 같아. 그래서 잠시 전원이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지. 그리고 오이가 기억하지 않기로 한 기억들도 랜덤으로 저장하는 것 같아. 나도 내 뇌가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노트북을 가지고 난 다음에야 내 머리가 컴퓨터와 비슷한 원리로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관리자 계정과 방문자 계정 혹은 그 외에 컴퓨터에 또 다른 계정을 생성할 수 있잖아. 관리자 계정에 오류가 생겼을 때 다른 계정이 기본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 같더라. 컴퓨터를 초기화해도 원래 기능은 무리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안에 정보가 지워져도 컴퓨터는 그대로 컴퓨터잖아? 나도 호박으로 잠시 전환되어도 그대로 나이긴 해. 대신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왔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지워지는 거지. 
      오이와 호박이 어울리는 음식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봐. 둘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맛은 전혀 다르고 둘이 같이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은 내가 아는 선에서는 없어. 이걸 떠올리니까 정말 내 두 뇌한테 붙이기 딱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둘은 절대로 같이 켜지지는 않아, 존재하기는 해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절대 어울리지는 않아. 한 쪽이 일어나 있을 때 다른 한 쪽이 잠들어 있는 거랄까. 그래서 오이와 호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내가 너에게 처음 내 머릿속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강 설명해줬을 때 그럼 호박이 되었을 때 자신을 만나면 어떡하냐고 물었지. 나는 정말 불안정할 때만 오이가 꺼지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어. 정말 내 뇌가 호박으로 켜졌을 때 본 너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지. 너는 그때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었어.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이야기를 너에게 털어놓았으니까. 어쩌면 내 착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네가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되기를 너무 간절히 바랐고 내 옆에 아주 오래도록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너를 떠나가게 한 걸지도. 호박은 왜 나에게 이런 알림을 보냈던 걸까. 도대체 빌어먹을 네 생일 같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호박일 때 겪은 걸 다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저 구석으로 밀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내 머리에 대해 좀 더 연구하고 연습하면 오이, 호박, 바나나, 고수, 등등… 더 많은 계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그럼 너에 대한 기억을 그게 가능하다면 컴퓨터의 전원을 켰을 때 몇 페이지를 넘겨야만 클릭할 수 있는 시나몬 같은 이름을 가질 계정에 처박아놓을 수 있을 텐데. 
      그 이후로도 네 생일처럼 아주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어. 오늘은 또 매번 걷던 우리 아파트로 올라오던 언덕길로 네가 올라오는 걸 멀리서 바라보던 내가 보였어. 네가 올라올 때쯤 시간을 가늠해서 복도에 서 있다가 언덕의 초입에 네 모습이 나타날 때부터 네가 그 길을 다 올라오고 다른 길로 향해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어. 과거의 기억은 1인칭 시점이 아니라 이렇게 3인칭 시점으로 떠오르더라. 그걸 보고 겪은 건 나인데 마치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호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을 현재의 나에게로 보내주는 걸까? 또 며칠 전에는 엄마가 젓가락질을 나한테 가르치려고 콩을 옮기라고 하는 모습을 식탁 뒤에서 내가 보고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어. 콩을 떨어뜨릴 때마다 등을 맞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어. 이런 왜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는 사소한 것들이 지워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아. 호박이 그 기억들을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나 봐. 언젠가 또 지금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억들이 나를 찾아오겠지.
      호박이 이렇게 너의 생일을 내 머릿속에 둥둥 떠 있게 만든 이후부터 자꾸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곤 해. 길을 걷다가 보드게임의 말을 누군가 옮겨 놓은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는데 네가 내 앞에 갑자기 놓여 있을까 봐. 버스를 타서 앉아 있다가도 카드를 찍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자리를 찾으려고 고개를 들 때 그게 너일까 봐. 만약 그게 너라면 분명 너는 어디선가 나와서 어디론가 향하는 중일 텐데 그게 아니라 네가 어떤 길에서도 나오지 않은 것처럼 눈앞에 서 있을 것 같아서 자꾸 다시 보게 돼. 눈의 초점을 한 곳에 맞추면 주변의 것들은 모두 희뿌옇게 변하는 것처럼 호박은 초점이 맞은 어떤 것만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걸 내미는가 봐. 특히 그게 오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면 더더욱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이 희미해져서 포커스가 맞춰진 부분의 세세한 것들만 기억나는 듯해. 그런 맥락도 없는 작은 것들이 자꾸 네 생일처럼 혹은 보드게임의 말처럼 뜬금없이 등장하면 실제 현실에서도 네가 어느 순간 나타나 있을까 봐 그게 무서워. 
      볼링핀이 저 멀리서 힘차게 달려오는 볼링공에 맞으면 펑 소리가 나면서 그 충격에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걸 상상해 봐. 그렇게 오이의 낭떠러지에 있던 기억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공을 맞고 호박에게로 향하는 강물에 떨어지면 기억들은 조각조각 흩어져 흐르고 그 강물은 호박에게 닿아 곳곳에 스며들겠지. 모여 있던 기억 덩어리가 무언가에 부딪혀 터져 버리고 나서 남은 그런 파편들을 호박이 간직하고 나는 이제 순간들을 그것들로 기억하게 되는 것 같아. 그 전에는 무얼 했고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아주 사소한 사실들만 남는 거지. 아무리 조리개를 돌려서 다른 곳을 보려고 해도 그 부분만 선명해질 뿐인 것처럼 말이야. 
      다행인건지 호박으로 아예 전환되는 일은 드물어. 중학생 때 처음 호박의 존재를 느끼게 되었을 때나 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때가 바로 그 드문 일이 일어난 때였어. 방금 볼링 얘기를 했었지.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 그 패턴을 찾고 싶어지기 마련이지. 그래야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잖아. 아니면 최소한 미리 대비할 수라도 있으니까. 볼링공이 볼링핀을 쓰러뜨리는 걸 떠올리게 된 게 몇 번 호박으로 아예 바뀌고 나서였어. 호박으로 바뀌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나한테 뭘 줬었던가 내가 이상한 걸 먹었던 건가 기억을 더듬어 봤어. 처음에는 말도 안되지만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어떤 실험을 통해 태어난 존재라서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 이런 괴상한 일들을 겪는 건가 싶기도 하고 누가 저주를 건 것은 아닐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각종 이상한 일들은 다 꺼내 본 것 같아. 잠깐 일어났던 그 일이 왜 일어난 건지 왜 하필 나인 건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 곰곰 생각해 보니 볼링공이 없었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더라. 볼링공이 날 치지 않았으면 볼링핀이 쓰러질 일도 없을 거고 핀이 절벽으로 떨어지듯 검은 뒤편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럼 볼링공이 도대체 뭐였을까 도대체 뭐가 나의 기억들을 이렇게 산산조각 낸 걸까 궁금했어.
      지금도 사실 내가 낸 이론을 백 퍼센트 확신하는 건 아니야. 다만 짐작할 뿐이지. 중학생 때 그날은 오랜만에 오빠를 보러 다녀온 날이었어. 엄마한테 며칠 전부터 오빠가 연락을 안 받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곧 연락이 되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어. 오빠는 그때 우리랑 떨어져서 다른 곳에서 따로 살고 있었는데 며칠 째 연락이 안 되니까 엄마가 오빠를 찾아가보자고 했어. 나는 그냥 핸드폰 확인이 귀찮아서 안 보는 걸 거라고 아니면 그냥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처음엔 내키지 않았는데 엄마가 자꾸 같이 가보자고 해서 가게 됐어. 이쯤 되니까 살짝 걱정되기도 하고. 오빠 집으로 향하는 길에도 계속 전화를 했어. 그래도 안 받으니까 점점 걱정이 밀려오더라. 지금 가는 게 늦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다행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핸드폰이 고장난 거였더라고. 근데 귀찮아서 수리를 안 하다가 늦어진 거였고. 따로 떨어져 살다보니 그렇게 많이 연락을 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상황일 때 어디 물어볼 데가 없더라. 그 집에서 돌아오고 나서 혼자 횡단보도를 걷고 있었는데 그때 잠시 멍해졌던 거야. 호박이 나타난 거지.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 있느라 신호가 다 끝나고 차들이 빵빵 경적 소리를 울려대던 게 기억나. 
      너를 만나던 날은 우리가 만나기로 해놓고 만나지 않다가 아주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지. 우리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예감했던 것 같아. 그날이 어쩌면 정말 너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날 난 내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 털어놓아야겠다고 다짐했어. 몸과 마음이 다 무너져서 뭐라도 붙잡을 것이 필요했어. 그 방법으로 내 상처를 뒤집고 파내는 걸 선택한 거야. 너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고 그걸 막기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과 행동을 하면서까지 나를 갉아 먹는 방법을 택한 거지. 이미 거기에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몰라.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다는 건 다른 모든 걸 시도해봤지만 실패했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니까.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니까. 그날은 그렇게 날 것의 상처를 다 뱉어내며 지나갔고 난 그날 이후로 너를 다시 보지 못했어. 
      죽음이 바로 뒤를 돌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 상실과 이별과 아픔과 고통과 우울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나와는 동떨어진 게 아니라 고개만 돌리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에 호박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오빠가 방 안에서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살아있는 너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며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볼링공이었던 거야. 호박이 어쩌면 이런 볼링공의 충격을 흡수해주는 완충 장치 역할을 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요즘 호박이 자꾸 자기가 가진 파편들을 하나씩 빼서 오이에게 찔러 넣는 걸 보고 있자니 곧 다시 오이는 아예 꺼지고 호박만이 켜질 날이 올까 봐 두려워. 호박은 나름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 있는 호박이 내 뇌의 관리자가 되면 아까 말했듯 난 혼란스럽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득한 기분이 들 거야. 너를 마지막으로 본 날 호박이 나왔으니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도 왠지 호박이 오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무서워. 너를 다시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거든. 그냥 내 감정을 쏟아내기만 하고 너에게 어떤 말도 듣지 못했고 그렇게 나를 떠나간 너를 실컷 욕하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호박이 그때 흡수한 충격을 지금에서야 조금씩 자꾸자꾸 내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상실을 마주할 것 같은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기억으로 호박이 오이를 쿡쿡 찌르면 자꾸 편지가 쓰고 싶어져. 그 파편들을 모아서 볼링공이 볼링핀을 쳤던 그 순간을 찬찬히 돌려보고 싶어서. 뒤로감기 앞으로감기 버튼을 자유로이 누르면서 그때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사건을 지금에서라도 내 의지로 들여다보고 통제하고 싶어서. 다시 너를 만나게 되면 어떤 뇌가 켜질까? 어디에 그 기억이 저장될까? 그 기억도 조각조각 부서져 여기저기 저장될까? 다시 너를 만나는 날은 그때와 달리 나 자신의 상처를 헤집지 않고도 하고픈 말을 다 할 수 있을까? 호박으로 충격을 완화하지 않고 오이만으로도 버텨낼 수 있을까?
      난 이제 환한 빛이 날 쬐는 무대로 나갈 거야. 나를 가장 밝게 만들어주길 바랐던 너는 없고 내 앞에는 깜깜한 객석이 있지만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보면 그 작고 희미한 불빛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감정이 들어. 네가 어디선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아도 돼. 다시 만나면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끝없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이 위에서만이라도 난 어울리지 않는 오이와 호박이 어떻게든 어우러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 컴퓨터가 켜졌다가 꺼졌다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켜졌다가 꺼졌다가 하는 것처럼 계속 죽고 살고 다시 죽고 다시 살아나고 하는 과정 속에서. 아까 말했듯이 둘은 절대로 같이 켜지지는 않아. 하지만 난 언제나 이 둘을 느껴. 그게 가끔은 너무 괴롭고 시끄러워. 소란스러운 고요가 내 머릿속엔 가득해. 하지만 무대에서 나와 닮은 듯 다른 제 3의 인물의 말과 행동으로 서 있으면 둘 모두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오이와 호박을 오갈 수 있어. 우리는 이 유한한 삶에서 계속 죽었다 살아나는 존재야. 끊임없이 과거의 나와 이별을 맞이하고 새로운 나와 만나는 존재인 거지. 무대에 오르는 과정도 비슷해. 무대의 불이 꺼지는 순간 몇 시간 동안 무대에서 살아있던 그 인물은 죽어. 하지만 다음날 무대에 다시 오르면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지. 컴퓨터가 꺼졌다가 켜지는 것처럼, 볼링공을 맞고 새로운 핀이 다시 세워지는 것처럼, 오이가 호박으로 또 다시 태어났던 것처럼. 이런 죽음과 삶을 오가는 체험을 하고 나면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 같은 것들도 어쩌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같이 존재할 수 있겠구나 싶어. 언젠가 지금까지의 볼링공보다 훨씬 크고 빠른 공이 다가와서 나를 칠지도 모르겠어. 그때는 오이와 호박에서 나온 바나나가 등장할지도 모르지. 더 복잡한 방식으로 나를 괴롭히고 서로에게 침입할지도 몰라. 그래도 이해해보기 위해 계속 반복할 거야. 계속 편지를 쓰고 무대에 오를 거야. 깜박거리고 반짝거리는 사람들의 눈을 보며 오이와 호박을 동시에 느끼며.

    *에필로그

    (불이 켜지고 배우가 오이와 호박을 들고 무대에 오른다) 

    배우: 안녕, 여러분 다들 모였나요? 그동안 잘 지냈죠? 여러분 얼굴 하나하나를 보고 있자니 (손에 들고 있는 오이와 호박을 쳐다보며) 여러분들이 주고 갔던 오이와 호박이 떠올라요. 저는 모양과 길이가 제각각 달랐던 오이와 호박을 안고 잘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걸 매일 보면서 잘근잘근 씹어먹어요. 그런데 여러분 오이랑 호박 같이 먹어본 적 있나요? 저에게 오이와 호박을 주고 갔지만 단 한 번도 그래 보신 적 없죠? 저는 이제 같이 먹어보려고요. 한 번도 동시에 씹어본 적은 없어요. 오이를 쌈장에 찍어 먹거나 호박을 부쳐 먹거나 해서 따로 먹어 본 적은 있는데 생으로 같이 먹어본 적 없거든요.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 같이 먹어 볼 생각조차 못했어요. 도대체 어느 누가 같이 먹을 생각을 하겠어요? 그런데 저는 어느 순간 같이 받았는데 왜 같이 먹어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싶더라고요. 어떻게 같이 먹나 싶죠? 같이 먹기 조금 이상해 보여도 먹어 보면 은근 괜찮답니다? (오이와 호박을 아작 씹어먹으며) 맛있다니까요? 여러분 덕분에 새로운 레시피를 알게 되어서 감사해요. 덕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조합해보는 데 도전하게 됐고 오이나 호박처럼 저에게 찾아오는 우연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거든요. 

    (꾸벅 인사를 하며) 여러분 오늘 만나서 즐거웠는데요, 다시 만나지는 않았으면 해요. 아직까지는 여러분들이 주는 오이와 호박으로도 충분하거든요. 

    음, 그래도 내일은 바나나를 들고 올지도 모르겠네요.

    (불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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