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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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뱉는 연습종이비행기 2021. 9. 11. 22:58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공기가 갈비뼈 속에 꽉 들어찼다가 입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잠시 집중이 깨지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존재가 슬그머니 다시 찾아온다. 옆구리를 푹 찔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넣어주고 유유히 떠난다. 처음에는 그 공격이 무차별적이고 기습적이어서 당황했고 이내 비참해졌지만 지난 8개월 동안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놀랍지 않다. 또 시작이구나.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틀린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 빈도가 적어지면서 그 기억을 매분 매초 떠올리지 않고도 다른 생각을 하면서 웃고 행복해할 틈도 조금씩 생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겪지 않은 것처럼 완전한 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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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종이비행기 2020. 10. 30. 06:32
“아, 알겠다고. 내가 다 알아서 해.” “니가 뭘 알아서 해. 알아서 한다는 애가 아직도 이러고 있어? 사고난 지가 언젠데 집에 틀어박혀서 게임이나 하고. 나가서 일을 하길 해 친구를 만나길 해. 저 피규어는 볼 때마다 지겨워 죽겠어. 갖다 팔든가 버리든가. 이렇게 처박혀 있는 꼴 계속 보다간 내가 답답해 죽겠으니까 계속 이럴 거면 나가!” “씨발, 이 따윈데 친구가 어디 있어? 됐어, 그냥 내가 나가면 되잖아. 그럼 서로 짜증날 이유도 없고 좋겠네 아주.” 그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집을 나왔다. 있는 것도 눈치보였던 내 작은 방에 있던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계속 전화가 와서 그냥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꺼버렸다. 엄마는 항상 그런 식이다. 나를 걱정해주는 건지 본인의 화를 나한테 푸는 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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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종이비행기 2020. 10. 11. 19:05
언니를 찾아야 해. 깜박이는 전등 아래서 눈을 뜨자마자 내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본 적도 없는 알지도 못하는 말간 얼굴이 보였다. 누군가 내 머릿속 흰 스크린에 사진을 띄운 것처럼 선명한 이미지. 어떠한 맥락도 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 같은 목소리와 이미지였지만 언니를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나에게 종종 찾아오는 아득하게 들려오면서도 확신에 차 있는 분명한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 그걸 따라가다보면 나처럼 외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엄마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나 할머니랑 있으면서 엄마가 행복하게 웃었던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에게 말을 걸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엄마 몸 속의 모든 구멍에서 솟구쳐 나올 것만 같았던 기억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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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배종이비행기 2020. 10. 10. 21:56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났다. 꿈인지 현실인지 더듬어보느라 한동안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옆에서 자고 있는 민수의 고른 숨소리가 만드는 평화로운 밤이 깨지지 않도록, 하지만 자신에게는 흐느끼는 소리가 마치 이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의 전부인 것처럼 영배는 잠깐 울었다. 살짝 물이 고여있는 눈을 깜박이며 어두운 방 안의 공기를 응시하던 영배의 시선은 어느새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끝에는 둥글고 밝은 달이 있었다. 달을 보며 영배는 생각한다. 이게 꿈인 게 좋을까 현실인 게 좋을까. 며칠 전 영배는 40년 지기 친구의 집들이를 다녀왔다. 집들이 겸 조촐하게 동창들 몇 명이서 부부 동반으로 모이기로 한 자리였다. 예전의 시절을 공유하던 사람들끼리 만나면 으레 그렇듯 과거 학창시절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