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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찾아야 해. 깜박이는 전등 아래서 눈을 뜨자마자 내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본 적도 없는 알지도 못하는 말간 얼굴이 보였다. 누군가 내 머릿속 흰 스크린에 사진을 띄운 것처럼 선명한 이미지. 어떠한 맥락도 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 같은 목소리와 이미지였지만 언니를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나에게 종종 찾아오는 아득하게 들려오면서도 확신에 차 있는 분명한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 그걸 따라가다보면 나처럼 외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엄마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나 할머니랑 있으면서 엄마가 행복하게 웃었던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에게 말을 걸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엄마 몸 속의 모든 구멍에서 솟구쳐 나올 것만 같았던 기억만 난다. 누가 본다면 지금의 나도 그렇게 보일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외로워 보였던 엄마의 뒷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때마다 나에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혹시 엄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이상 엄마는 나랑 친구를 해줄 수 없으니까 나에게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싶은 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따라간다. 깜깜한 세상에선 그런 작은 목소리가 더 잘 들리니까. 더 소중해지기도 하고.
‘수양아, 이쪽이야.’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잠시 멈춘다. 집이 아닌 바깥에서는 눈을 감아도 잘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눈을 감으면 위험해지기도 하고. 그럴 때는 잠시 길 구석구석에서 놀거리를 찾는다. 사람들의 발부리에 이리저리 채이는 돌멩이, 아스팔트 사이로 꿋꿋이 고개를 든 작은 꽃, 자신의 몸보다 큰 먹이를 들고 열심히 움직이는 개미, 트럭 아래로 숨은 고양이, 가로등 위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 바람이 불면 유유히 흔들리는 이파리. 잠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는 작지만 꾸준한 것들이 나의 친구가 되어 준다. 나는 묻는다. 너는 이름이 뭐야? 혈액형은? 가족들은? 답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이 아이들은 누구와 이야기를 할까? 나와 말을 하고 싶어 할까? 혹여나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계속 너희들에게 말을 걸게. 너희들도 내가 계속 말을 걸어주길 바라지? 언젠가 너희들의 이야기도 들려줘. 그렇게 바깥의 고요하고 꿋꿋한 것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보면 또 어느새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어 온다.
‘나를 찾아줘.’
아까 보았던 맑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이 말한다. 아까보다 더 분명하게 들려온다. 이제 가까이 온 것 같다. 소리를 따라 허름한 빈 집에 들어갔다. 여기도 말을 걸 친구들이 많다. 벽에 그려져 있는 크레파스 그림, 혼자 침대에 누워 있는 염소 인형, 똑딱 똑딱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시계. 열심히 거미줄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미. 그렇게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을 무렵, 멀리서 터덜터덜 운동화 소리가 들린다. 가로등만 켜진 거리에서 아까 보았던 투명한 얼굴이 지금 내가 있는 빈 집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니의 영혼이 날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큼 언니 앞으로 다가섰다. 잠시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꿈벅거렸다. 그리고 어색하지만 대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혈액형은?”
“…너는 이름이 뭔데?”
“저는 수양이에요.”
“…나는 혜정이야.”
우리는 이유도 모르면서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언니, 오늘 내 꿈 속에서처럼 그렇게 사라지지 마. 언니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을 몰라도 좋아. 내가 계속 말을 걸어 줄게. 우리 왔던 길을 반대로 걷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사라지기 전에 서로에게 말을 걸어 주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자. 어떤 말이든지 좋아. 나는 언니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언니는 나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