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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꿈에서 깨어났다. 꿈인지 현실인지 더듬어보느라 한동안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옆에서 자고 있는 민수의 고른 숨소리가 만드는 평화로운 밤이 깨지지 않도록, 하지만 자신에게는 흐느끼는 소리가 마치 이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의 전부인 것처럼 영배는 잠깐 울었다. 살짝 물이 고여있는 눈을 깜박이며 어두운 방 안의 공기를 응시하던 영배의 시선은 어느새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끝에는 둥글고 밝은 달이 있었다.
달을 보며 영배는 생각한다. 이게 꿈인 게 좋을까 현실인 게 좋을까. 며칠 전 영배는 40년 지기 친구의 집들이를 다녀왔다. 집들이 겸 조촐하게 동창들 몇 명이서 부부 동반으로 모이기로 한 자리였다. 예전의 시절을 공유하던 사람들끼리 만나면 으레 그렇듯 과거 학창시절 이야기로 몇 시간을 때우고,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적당히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가 적당히 부른 상태로 무탈하게 헤어졌다. 모두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영배도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그렇게 큰 불만 없이 간만에 반가운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고 생각했다. 다들 각자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모습이 행복해보였다. 민수와 약간의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최근의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민수가 옆에 있다는 것으로 영배는 나름 만족하고 있던 참이었다. 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원래도 그렇게 큰 애정이 있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돌아가지도 못할 거고 일은 많으니 다시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잔소리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런데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꿈 속에서 영배는 며칠 전 그 자리에서 그동안 말하면 친구들이 보일 반응이 뻔히 보여서 말할지 말지 고민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자신이 이혼을 하고 학교에서 쫓겨난 이유를, 너네들이 알고 있는 민서는 사실 민수고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을, 나는 남자를 좋아하고 게이라는 것을. 꺼내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말과 눈물이 몸에서 토해지듯이 빠져나왔다. 꿈에서도 사실 영배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직접 큰 마음을 먹고 친구들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면 이렇게 자는 도중에 꿈에서 깨어 한참을 눈을 뜨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영배는 줄곧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부단히 애를 써왔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것에 곤두서있는 것이 지쳐서 내심 자신의 비밀이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지듯 밝혀졌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렇게 되면 직접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도 없으면서 동시에 더 이상 누구에게도 민수의 존재를 비밀로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꿈인 게 좋을까 현실인 게 좋을까.
영배는 기울어졌다가 차면서도 언제고 문득 하늘을 바라보면 떠 있는 달과 옆에 고요히 누워있는 민수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생각을 이어나간다. 친구네 집에 집들이로 놀러갔을 때도 월식이라 다같이 창밖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 겨울낚시를 하러 갔을 때도 왁자지껄 모여 월식을 바라봤었다. 이렇게 몇 십년을 걸쳐 태양과 지구와 달이 묵묵히 돌아가는 동안 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다음 월식에는 어떤 모습과 마음으로 달을 바라보고 있을까.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바뀐 것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바뀌지 않는 사실은 나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것이고, 아직까지는 이렇게 민수의 자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는 것. 무릎을 안고 밤바람을 맞으며 달 옆의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어보고 있던 영배는 민수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라 이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책상에 있는 편지지를 꺼낸다.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지금 이 순간을 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영배는 엄마가 자신이 어릴 적 잠들어 있을 때 모습을 보며 써놓았던 편지를 우연히 찾았다. 그때 엄마도 달을 보면서 나에게 편지를 썼을까. 어떤 마음으로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글을 썼을까. 영배는 비슷한 마음으로 민수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다 쓰고 영배가 잠들 때쯤 민수가 일어나서 머리맡의 편지를 읽는다. 그리고 영배의 얼굴을 영배가 그랬던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런 영배의 얼굴은 오늘만큼은 꿈 없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