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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날아온 편지종이비행기 2020. 8. 10. 01:30
안녕하세요, 네 분 중 어떤 분이 제 편지를 먼저 읽게 되실까요. 모든 이야기에 대한 애정으로 잡화점을 처음 여신 하늘님? 먼 미래를 상상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바다님? 따뜻하고 울림을 주는 이야기에 기꺼이 마음을 쏟는 해님?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내는 아름다운 별 같은 이야기를 아끼는 별님? 제 이야기는 네 분께 어떤 이야기로 다가가게 될지 궁금하네요. 이야기 잡화점에 이 편지가 잘 도착하길 빌며 편지를 씁니다.
같이 동봉해드린 열쇠를 맡기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봅니다. 직접 잡화점을 운영하시는 분들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소문을 들어보니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들이 거기 보관되어 있다더군요.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다뤄주시고 보관해주신다고 들었어요. 제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에겐 떠올리면 미소를 짓게도, 눈물을 글썽이게도 하는 아주 소중한 이야기랍니다. 저는 이제 다시 이 열쇠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과 추억들을 모두 담고 있는 물건이라 꼭 어딘가에 보관해두고 싶었는데 이곳이 딱 적합하다 싶더군요. 가끔 과거를 뒤돌아보는 일도 있겠지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또 어쩌면 제 이야기가 담긴 물건이 거기에서 다른 이야기들과 만나며 다른 사람에게 가닿아 조용히 빛을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어 편지와 열쇠를 보냅니다.
제 소개가 너무 늦었죠, 저는 조 마치라고 합니다. 저는 글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답니다. 열심히 글을 써서 최근에 책을 하나 냈어요. ‘작은 아씨들’이라는 책이에요. 저에겐 메그, 베스, 에이미라는 사랑스러운 언니와 동생들이 있습니다. 그 중 베스라는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몸이 많이 약해 항상 걱정이 됐었는데…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 수 없게 됐어요. 베스는 제가 우리 가족에 대해 쓴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죠. 제가 돈벌이를 위해 쓴 어떤 이야기보다 베스는 그런 작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베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베스가 계속 이런 이야기를 써달라고 한 것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많은 걸 해주지 못해서 자꾸 마음에 걸렸나 봐요. 그래서 이렇게 아주 긴 이야기를 써서 출판까지 하게 되었네요.
밤을 새가면서 책을 쓰면서 제가 살아 오면서 한 선택들을 다시 떠올리게 됐어요. 이 열쇠는 그런 선택들과 관련된 물건이에요. 저는 어릴 적부터 글을 쓰고 싶었고 글을 쓰는 작가로서 세상에 당당히 두 발로 서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결혼도 하기 싫었어요. 여자들도 생각을 할 수 있고 의견이 있고 취향과 마음이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로서만 여겨지는 게 너무 지겨웠어요. 사랑은 물론 아주 중요한 가치지만 왜 여자들에겐 다른 무엇도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남자들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보호 아래서 어떤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부속품으로 여겨지는 걸까 항상 못마땅했고 그래서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강해지려고 떳떳해지려고 매일 스스로를 몰아부쳤죠. 그런데 그러니까 생각보다 많이 외로워지더라고요.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사람과 힘들 때나 기쁠 때를 공유할 수 있는 메그 언니를 보면서 부럽기도 했어요. 내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못되고 엉망진창이고 그래서 사랑받을 수 없는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러다 7년 전, 제가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로리의 마음을 들었던 순간이 떠올랐어요. 저희 집 창문을 통해 건너편을 바라보면 큰 집이 하나 있어요. 바로 거기 살던 할아버지의 손자가 로리였죠. 로리를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것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저에겐 아주 각별한 친구예요. 가끔 제멋대로이고 엉뚱한 면도 있긴 했지만요 하하. 그래서 저랑 많이 맞았던 걸까요? 저랑 로리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새로운 탐험을 해보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도 하며 그 시절을 보냈어요. 시끌벅적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춥기도 했던 그 시절을요.
이 열쇠는 우리 자매들과 로리가 연극을 하며 놀았던 그 시절과 관련이 있어요. 그때 로리를 우리 자매들이 하는 놀이에 끼워주기로 하면서 로리가 우리들만의 비밀 우체통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선물로 줬었어요. 거기 간식들을 넣어놓기도 하고 편지를 넣어놓기도 했었는데… 항상 열쇠를 챙겨다니며 저는 오고가며 그 우체통의 문을 열어보곤 했어요. 우리 자매들은 같은 집에 사니까 사실 서로에게 무언가를 줄 일이 있으면 직접 주면 되지 굳이 우체통에 넣어 놓을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우체통은 로리와의 대화창구 같은 역할을 했던 거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들어있던 그 문을 여는 일이 제 기쁨이었어요. 항상 설렜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모든 순간들이 갑자기 사진첩을 넘기는 것처럼 떠올랐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로리가 돌아오길 바라면서 로리에 대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넣어 놓은 거겠죠. 7년 전에는 거절했던 로리의 고백을 7년 후에서야 돌고 돌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어요. 사랑을 하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로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들을 거치면서 누군가가 날 사랑해줬던 것이 생각났고 그때는 어떤 것보다 그게 간절히 필요했어요. 그런데 이미 늦었더라구요. 로리는 제 동생인 에이미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그 다음에 전해들었어요. 저는 그 편지를 쓰면서 무얼 바랐던 걸까요.
로리가 그리웠고 그 시절을 생각하며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서 굳이 나만 바보같이 결혼하지 않고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약 그 편지가 로리에게 전해졌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결혼을 했다면 나는 과연 행복했을까? 이 질문을 편지를 넣으면서도 잠시 떠올렸던 것 같아요. 그때는 외로운 마음이 더 커서 이 목소리는 금세 잊혀졌지만요. 잘 모르겠어요. 로리와 결혼을 했다면 행복했을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공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을지.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어쩌면 로리가 에이미와 결혼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하
그래서 이 열쇠를 보냅니다. 가난했고 아버지가 없어 허전했던 시간을 웃음으로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게 해준 아주 소중한 추억을 한 켠에 보관하고 싶어서요. 지금의 저를 만든 하나의 물건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미래의 저에겐 사실 필요할 것 같지 않아요. 이제는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대로 그곳에 머무르게 할래요. 자꾸 꺼내보았다간 계속 그리워지기만 할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그때 로리에게 줄 편지를 넣어놓았던 것처럼 또 다시 그리운 것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지금의 제가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워요. 저는 지금 아주 부자인 저의 큰고모가 저에게 남겨주신 집에 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우리 가족들과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이 요즘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이 편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열쇠를 잘 보관해주시리라 믿어요. 아주 먼 훗날 제가 다시 열쇠를 찾으러 가게 된다면 그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언젠가 주인장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네요. 그때까지 모두들 평안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