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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는 글쓰기뭐든 먹는 송아지 2020. 12. 17. 23:30
줄리 앤 줄리아 (2009) 내가 요즘 매일 조금씩 글을 쓰는 것처럼 <줄리 앤 줄리아(2009)>의 줄리도 매일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 이 영화는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요리책을 만드려는 요리사 줄리아와 시간이 흘러 그런 줄리아의 요리책을 보고 365일 동안 524개의 레시피로 매일 요리를 하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줄리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나온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잔잔하고 따뜻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넘겼을 텐데 지금 집에 있으면서 요리를 자주 하게 되고 요리에 관한 글도 써보아서인지 그리고 매일 글쓰기 프로젝트에 조금씩이라도 글을 써서 인증을 하고 있어서인지 1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줄리의 모습이 예사롭게만 보이진 않았다. 나는 줄리처럼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요리를 한 다음에 글을 쓰는 것도 아닌 비교적 쉬운 프로젝트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거워하고 있는데 무려 524개의 레시피를 매일매일 만들어서 올린다니! 심지어 이 연재 프로젝트는 영화 속의 소재로 쓰인 허구의 사건이 아니라 줄리 파웰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블로그에 써서 올린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매일 무언가 꾸준히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는 요즘이어서 그녀의 도전과 노력이 유난히 와닿았다.
줄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삶의 의욕도 없고 재미도 찾지 못했었는데 일년 간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먹고 글을 쓰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점점 삶에서 행복을 찾는다. 매일 단순한 것도 아닌 두 가지 이상의 요리를 하고 보이지 않는 익명의 독자들과 소통하다 보면서 함께 사는 남편과의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의 이해와 배려 그리고 줄리의 주변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성격 덕분에 그녀의 일년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프로젝트 무사 마무리 기념으로 주변 사람들과 조촐한 파티를 한 후 남편이 줄리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줄리아의 요리책을 보면서 책 속의 줄리아를 사랑하게 되고 언젠가 줄리아와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다짐한 줄리에게 줄리아가 그녀의 블로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코멘트가 날아온다. 줄리아는 불쾌하다는 입장을 내비쳤고 줄리는 그 소식을 듣고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본인이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에게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그녀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줄리아가 당신을 구원한 게 아니야. 당신이 당신을 구원한 거지. You saved yourself
물론 줄리아의 요리책이 없었다면 이런 프로젝트도 있지 않았겠지만 그 전에도 줄리는 작가로서 무언가를 계속 쓰고 싶어했고 꼭 이것이 아니었더라도 무언가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했던 말처럼 그녀 스스로가 매일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절망과 무기력에서 그녀 자신을 길어올린 것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자율적인 것이었고 끝까지 마무리를 지은 것도 줄리아가 아닌 줄리였기 때문이다.
매일 시간에 쫓겨 겨우 한 꼭지씩 올리는 나지만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나면 나도 줄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글쓰기가 나를 구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프로젝트를 한 번 무사히 끝내고 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자기 효능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조금씩이라도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믿을 수 없는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깜박이는 커서를 인식하고 곧이어 노트북 화면에 타자를 치는 나의 모습이 보일 때 무한한 빈칸에 막막한 기분도 든다. 글을 쓰기가 싫어 노트북 창 속을 이리저리 헤매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트북 앞에서 보내는 나와의 시간 덕분에 그냥 무력하게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을 붙잡고 기록할 수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블로그에 내가 일 년 동안 써온 글을 보면 아쉬운 점도 있지만 뿌듯함도 크다. 100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줄리처럼 마지막에 웃을 수 있길.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 또 다른 프로젝트도 도전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아주 조금 품고 있다.'뭐든 먹는 송아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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