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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과 사랑을 재현할 때
    뭐든 먹는 송아지 2021. 1. 6. 23:52

     

    노멀 피플(2020)

    단순히 시기가 맞물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몇 가지 일들이 내 머릿속에서 얽히고 섞여서 종종 연관지어지곤 한다. 그중 최근에 접한 두 가지 사건 혹은 이야기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며칠 전 BBC의 <노멀 피플>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처음 웨이브에서 홍보를 할 때는 제목이 너무 평범하고 이 드라마와 관련된 사전 정보를 전혀 몰랐어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콘텐츠 추천 기사에서 다시금 이 드라마를 발견하고 시도해볼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좋았다. 메리앤과 코넬의 관계에 오롯이 집중하는 이 드라마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영상으로 그들의 감정을 묘사해내기 위해 세심한 공을 들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인물의 얼굴 혹은 작은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클로즈업 숏들이 미묘한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렇게 다른 드라마에서 쉽게 취하지는 않는 방법을 통해 평범하지만 단독성을 가지고 있는 두 인물의 표정을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뻔해보이는 사랑 이야기로 보여졌을지 몰라도 드라마를 모두 보고 나서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감해 그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헤아려 보려고 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배우들의 인터뷰와 관련 기사들을 몇개 찾아보고서 느낀 것은 이 드라마가 뿜어내는 따뜻함과 편안함만큼 그 촬영 과정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몇 년간의 시간에 걸쳐 두 인물이 사랑하고 엇갈리고 다시 마음을 확인하는 모든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두 인물이 사랑을 나누는 섹스신도 아주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옷도 걸치지 않고 서로의 앞에 나체로 설 수 있는지 그 과정과 순간을 잘 담아내기 위해 Intimacy Coordinator(친밀감 전문 연출가)라는 전문가가 나서서 어떤 식으로 촬영을 할지 충분한 대화와 합의를 거쳤다고 한다. 내러티브 속에서는 둘만의 순간이지만 카메라가 개입되면서부터는 촬영현장의 수많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작품을 볼 잠재 관객들의 시선들 또한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런 장면을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아주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껴져야만 하는 순간을 이 드라마는 너무 과도하거나 자극적으로만 담지 않았고 그래서 특별하고 어쩌면 아름답게까지 그린다고 느꼈다.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최근의 사건이 생각났다. 김기덕 감독이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김 감독은 국제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꾸준히 작품을 만들어서 본인만의 예술관을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예술적으로 분명 한국영화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부분들이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계 관련 미투가 폭로되고 그의 그동안의 발자취가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다. 가혹한 방식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고 강제로 성관계 장면을 촬영하도록 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여러 폭로와 고소 후 김기덕 감독은 해외로 잠적했고 간간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었다. 

    영화란 예술은 과정보다는 결과적으로 편집된 영상으로 평가되는 예술이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화면 뒤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눈물과 시간이 들어가는 작품에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방법으로 장면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걸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여러 사람의 영혼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만들어져야 하는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소식이 들려오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씨네21 1286호에 실린 '김기덕 감독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서 배동미 기자는 “세상에 만들어져선 안될 영화는 없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만들어져야만 할 영화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것이 예술의 본질일 것인데 그것보다 예술이 우선되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결과만을 중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지 아득하기도 하다. 

     

    어쩌면 비틀려보일지 모르는 관계일지라도 영화라는 형식 속에서의 합의와 동의, 약속 하에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영화들이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제대로 된 사실관계도 규명되지 않았고 사과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또다시 무력한 죽음을 맞았다. 실제로 <노멀 피플>에서 고용된 Intimacy Coordinator의 존재는 해외에서도 미투 운동이 발발하면서 더욱 부각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충분히 배우들의 의사를 고려하고 재차 확인하는 노력이 한국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주 친밀한 장면을 찍었을 때의 소감이 어떻냐고 묻자 <노멀 피플>의 코넬 역을 맡은 배우 폴 메스칼(Paul Mescal)은 "안전하다고 느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얻었다(safe and empowering)'고 답하기도 했다. 관객인 우리들에게 소중하고 특별하게 다가오는 작품이 그 작품을 만드는 모든 참여자들에게도 그렇게 기억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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