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수능날이 점점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수능을 봤던 나의 경험도 이제는 하나의 추억에 그치는 날이 되어가고 있다. 수능 이후의 삶이 더 많이 남아있는데 수능을 보기 전에는 수능이 거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대부분의 수험생이라면 그렇겠지만. 그래서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엿들은 수능을 앞둔 것 같은 수험생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귀여우면서도 가소로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간헐적으로 대치동에서 조교 알바를 한다. 시험대비를 하는 기간에만 또 그것도 가장 바쁜 요일에만 나가기 때문에 정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이렇게 우연히 친구를 따라 대치동에서 일한지 벌써 햇수로는 이 년이 되어간다. 우리집에서 대치동은 너무 멀어서 자발적으로는 가볼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주변에 놀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거기 사는 친구나 친척이 있지 않은 나에게는 유명무실한 동네였다. 그런 내가 대치동에서 어쩌다 이 년씩이나 알바를 하고 있느냐 하면 음... 아무래도 역시 돈과 타이밍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제는 꽤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친구가 조교 알바를 하던 중에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일손을 구할 때 내가 마침 너무 한가했던 것 같다. 뭐라도 알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나는 몇 번만 나가면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아주 먼 대치동까지 가는 알바 자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렇게 중간, 기말고사 기간에 틈틈이 알바를 했고 아이들이 방학을 하거나 시험을 보는 기간에는 쉴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며 약 반 년 정도를 조금씩 일했다. 그리고 그 사이 코인노래방 알바를 하게 되었고 그곳은 집과 훨씬 가까워서 대치 알바를 쉬는 동안 코노에 자리를 잡아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시급이 조금 더 낮긴 하지만 접근성이 용이한 것이 가장 좋지 않은가. 그런데 코로나가 터져버렸다. 꿀이라고 생각했던 코노알바가 자꾸 기약없이 중단되니 처음에는 알바를 가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으나 점점 돈이 떨어지고 언제 다시 운영을 재개할지도 몰라 일정을 마음대로 잡을 수도 없어서 조금씩 불안해져 왔다. 대치 알바를 그만두려 했다가 다시 잡아야 하는 상황이 와버린 것이다. 친구가 다른 친구를 구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일정 조정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치 알바를 하고 있는 이유를 너무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어제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바로 이 알바를 이 년동안 해 오던 나에게 아주 긴장되는 날이었다. 친구 없이 나 혼자서만 학원을 나가게 되었던 거다. 친구랑 우스갯소리로 나 자신을 ‘조교의 조교’라고 부르곤 한다. 나는 조교인 친구를 돕는 역할로 가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조교 전체 업무는 잘 모르고 내가 주로 하는 업무만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주 완벽한 분업 체계로 후다닥 일을 해내곤 한다. 친구가 담당하는 복사 업무를 나는 거의 해본 적이 없다. 또 가장 중요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해야 하는데 대치동 맛집도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혼자 모든 걸 해본 적은 없는데 친구 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걱정이 많이 됐다. 나는 조교의 조교라서 조교 친구가 해주는 명령만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라는 것만 하면 사실 마음은 굉장히 편하다. 물론 나도 엑셀을 정리하면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꼼꼼히 확인하지만 그래도 반쯤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든다. 어제는 그래서 밥도 혼자 먹고 연락도 혼자 확인하고 출석체크도 혼자 하고 복사도 혼자 하는 대치에서 최초의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전까지는 일의 힘듦을 친구와의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풀어내곤 했다. 말도 안되는 말장난을 이어가면서 깔깔거리기도 하고 지난 시간 동안 학생들과 있었던 웃긴 에피소드를 상기하기도 하면서 무지막지한 이백 명 정도의 학생들을 감당했다. 그런데 어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유난히 점심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은 두 학생의 말이 귀에 꽂혔던 것 같다. 시간 안에 먹고 들어가기 위해 뜨거운 우동면을 후후 불어가면서 먹고 있는데 특목고니 수시니 정시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두 명은 엿듣기론 고3 학생인 것 같았다. 그 중에 한 학생이 수능 전에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바닥에 떨어진 게 있을 때 그건 떨어진 게 아니라 바닥에 철썩 붙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그랬다며 다른 학생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심 웃기면서도 저 학생들에겐 그만큼 간절하니까 저런 말도 나오는 거겠지 싶었다. 당연히 그 친구들도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겠지만. 나에겐 너무 수능이 이젠 멀어져 버린 일이라 그 간절함과 불안함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저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나도 수능을 앞둔 상황이었다면 비슷한 감정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을텐데 그걸 지금 듣고 있는 나는 그런 말을 비웃어버리고 싶었다. 수능이 전부가 아닌데 저렇게까지 하면서 목맬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안절부절하고 점수 몇 점에 절망하고 위태로웠던 내가 떠올라서 그 말을 뭉개버리고 이 사회가 잘못된 거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수능만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지만 학창시절 전부를 대입을 향해 달려가게끔 만드는 입시구조 하에서는 수능만큼 학생들을 두렵고 힘들게 하는 건 없을 것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쉬는 시간과 급식 먹는 시간 사이사이 웃고 떠들고 서로를 격려하던 시간들이 생각나 고맙고 재밌기도 하지만 두 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또 동시에 든다. 재수를 정말 하기 싫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볼 수밖에 없고 옆의 친구보다 못하면 괜히 주눅 들고 자신감을 잃고 나는 못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그런 모든 것들이 나를 비롯한 정말 많은 학생들을 은근히 억압하고 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더더욱 몰랐던 것 같고.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다. 우수한 인재나 스타가 발굴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안에서 다들 얼마나 무너지고 깎이고 아플까. 학원가에서 일하는 것은 멀어져 버려서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고등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위치를 곱씹으면서 그 시차가 얼마나 큰 지 가늠해보곤 한다. 지금 보이는 것과 나중에 보이는 것은 또 얼마나 다를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들은 몇 주 후에 수능을 보았을 것이다. 올해의 수능은 미뤄지긴 했지만 11월이 되니 다시 예전 기억을 꺼내보게 된다. 날씨도 소위 말하는 ‘수능 냄새’가 폴폴 난다. 수능이 다가오면 날씨가 추워진다고 해서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수능이 다가왔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수능이라는 제도를 없애고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없어 그 안에서 매년 쳇바퀴 돌듯 비슷한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안타까워 하기만 한다. 그래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입은 정말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정말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 이후의 삶이 훨씬 넓게 펼쳐져 있으니 다들 너무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만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