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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와 우리 동네뭐든 먹는 송아지 2020. 10. 26. 04:56
문을 열고 나가면 보이는 우리 동네 개나리 하면 떠오르는 두 사진이 있다. 어렸을 때 개나리 앞에서 찍은 사진과 고등학교 때 날이 좋아서 선생님을 졸라 바깥으로 나가 수업을 하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개나리의 쨍한 노란색 때문인지 개나리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어릴 때 찍은 사진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내 기억 속의 개나리 앞 나는 여섯일곱 살 정도 돼보인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찍은 것인데도 왜 개나리 하니까 그때 그 사진이 단번에 떠올랐던 것일까? 필름으로 찍고 인화한 사진이라 지금 그 사진이 우리 집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데 사진을 어디에서 찍었는지는 기억이 난다. 내가 당시 살았던 우리 아파트 1동 앞에서 찍었었다. 1동에서 2동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으로 가기 전에 넘어가야 하는 시멘트 언덕이 하나 있다. 그 옆의 주차장 턱에 부지가 있는데 개나리는 바로 거기에 피어있던 것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아파트에 살았고 지금도 여기에 산다. 그래서 밖을 나갈 때마다 내가 사진을 찍었던 개나리가 피었던 바로 그 곳을 매번 지나간다. 1동을 제외하고 우리 아파트의 모든 동은 한 언덕을 올라가야 있다. 그 윗동네에는 네 개의 동이 있는데 나는 어렸을 때를 빼고는 계속 이 윗동네의 동들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래서 1동에서의 기억은 굉장히 희미해 간간히 사진으로나 어렴풋이 그때를 떠올려본다. 이런데도 거기서 찍었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지만 가장 많이 지나쳤을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기억일텐데도 불구하고 개나리가 아직도 거기서 피는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이렇게 무지할 수가 있는지 나 자신에게 놀랍다. 작년 봄에는 한국에 없었고 올해 봄은 많이 바깥에 나가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사진을 찍을 때 말고는 개나리를 자세히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병아리 같은 색에다 나의 어릴 적 시절도 함께 떠오르게 하는 추억의 꽃친구인데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오늘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나도 자랑하려고 잠옷을 입은 채로 잠깐 밖에 나가서 우리 집 문 앞에서 보이는 풍경을 찍어보았다. 친구에게 보내줄 인증용 사진일 뿐이었는데 찍어보니 너무 맑고 예뻐서 몇 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이 풍경이 해리포터에 나오는 신문에 실린 사진처럼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입체적으로 보이기도 해서 사진이 아니라 창밖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고 나서 드라마를 한 편 보았다. 이어즈 앤 이어즈라는 HBO 드라마다. 우리의 근미래를 너무 소름끼치고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인데 우리 앞에 닥칠 소름끼치는 그렇지만 우리가 자초한 일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빙하가 모조리 다 녹아버렸다든가 원자폭탄이 터진다든가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런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고 여러 초록의 색으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 풍경을 보자니 이 풍경이 눈 앞에서 종이조각처럼 찢겨 한 순간에 사라질까 두려워졌다. 개나리를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주변에 있는 소중한 아름다운 것들을 이제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말이다.
너무 아름다운 나의 동네, 자꾸 떠올리게 되어 괴로운 기억도 있었지만 그냥 주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날들도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동안은 앞만 보고 가느라 바빴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고 눈에 담으면서 내가 살아온 이 동네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다. 다음 봄에는 꼭 우리 아파트에 아직도 심어져 있는 개나리를 찾아 찬찬히 들여다보고 다시 함께 사진을 찍어야겠다.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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