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내뱉는 연습

쏭아지 2021. 9. 11. 22:58

래빗홀(2010)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공기가 갈비뼈 속에 꽉 들어찼다가 입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잠시 집중이 깨지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존재가 슬그머니 다시 찾아온다. 옆구리를 푹 찔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넣어주고 유유히 떠난다. 처음에는 그 공격이 무차별적이고 기습적이어서 당황했고 이내 비참해졌지만 지난 8개월 동안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놀랍지 않다. 또 시작이구나.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틀린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 빈도가 적어지면서 그 기억을 매분 매초 떠올리지 않고도 다른 생각을 하면서 웃고 행복해할 틈도 조금씩 생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겪지 않은 것처럼 완전한 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우개로 빡빡 문질러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끈질기게 자꾸 기억을 불러오는 어떤 이상한 놈을 붙잡고 신세한탄이라도 하고 싶다. 그놈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때리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실체가 있다면 정말 그렇게 할 텐데. 처음에는 아주 커다란 돌멩이를 던져서 시도 때도 없이 정신을 못차리게 만들다가 조금씩 작은 돌을 던져주는 건가? 그러면 고마워해야 하나?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되는 거였잖아.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그때 그 시간이었어. 또 천장을 바라보며 지겹게 머릿속의 목소리와 싸웠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진 것 같다. 

 

  아냐, 주먹을 꽉 쥐어야지. 일어나야지. 내일은 하위의 생일이다. 하위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구울 것이다. 재료를 풀고 섞고 젓고 빵이 오븐에서 부풀어오르는 걸 보면 마음이 조금은 평화로워진다. 그런데 만드는 과정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예쁘게 생크림을 발라 장식해둔 케이크를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다시 재료를 뒤섞어 처음의 상태로 만들어 다시 케이크를 만들고 싶다. 다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누군가가 와서 케이크의 옆을 움푹 파내버릴 것만 같다. 한 구석이 주저앉아버린 케이크의 모습이 상상돼 참을 수 없어진다. 그럴 바엔 내가 먼저 얼굴을 박아버리고 싶다. 대니가 없는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만, 내 안에서만 예쁘게 구워진 케이크가 무너지고 있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것도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그냥 대니만 집게로 콕 집혀 이 세상에서 빠져나간 것 같다. 

 

  생각이 드는 걸 행동으로 옮겨보기로 한다. 욕도 그냥 내뱉어 보고, 케이크를 부수고 싶으면 부수고, 걷고 싶으면 걷고, 뛰고 싶으면 뛰고,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맞고, 신발을 벗고 흙을 밟고 싶다. 세상이 대니의 죽음을 모른 체 하면 내가 그게 아니란 걸 보여주면 된다. 여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위와 나에게 소중했던 존재를 기억한다고, 잊지 않고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영원히 잊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면 된다. 우리는 케이크가 망가지고 부서져도 다시 케이크를 구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여전히 하위를 사랑할 수 있고 그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선 지금은 그냥 내뱉어본다. 뭐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행동을.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적어도 저 무심한 세상과 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해소된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시면서 그냥 무작정 뛴다. 소리를 지르면서 내달린다. 비가 오든 말든 몸이 젖든 말든 상관없다. 

 

언제나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즐겁고 웃음짓게 하는 일들도 있다. 그러니까 그립고 슬픈 기억은 그것대로, 행복하고 안온한 감정은 또 그것대로 찾아오도록 지금의 감정을 비워내야 한다. 그래야만 내게 소중한 것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치지 않고 품고 갈 수 있다. 그것들만은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게 내가 오늘도 숨쉬는 걸 연습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