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의 대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 모르겠어서 알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분야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더 알고 싶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 영화란 무엇인지 왜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그렇게 유명하고 호평을 받는 건지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하게도 단순히 영화만을 넘어서 이 시기에 나는 나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사람들이 각자 본인이 인상깊게 본 영화를 말하고 자신있게 본인의 취향을 말하는 모습들이 부러웠다. 정작 나는 이것도 괜찮은 것 같고 저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그 영화에 대한 혹평을 늘어놓거나 혹은 칭찬을 하면 팔랑귀마냥 흔들렸다. 좋다고 생각하다가도 안 좋은 이야기가 들려오면 이게 아닌가 싶었고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장점을 말하면 아 그런건가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싶었다. 나만의 기준이 왜 나에게는 없는 걸까 나 자신을 자책하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조금은 답답한 마음에 그즈음 우연히 영화 관련 책을 쓴 분들과의 북토크에 참여할 일이 있어 그런 질문을 했었다. 좋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을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아니, 본인들에게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물어봤던가. 아니면 좋은 영화란 무엇인지 물어봤던가. 어찌 됐든 강연자 분들은 포스트잇에 적힌 내 질문을 보고 좋은 영화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정확한 표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맥락이었다. 그런데 물론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 분위기가 나에겐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뭘 이런 걸 물어보느냐는 말투처럼 들렸다. 너무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어서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걸까 아니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 당황했던 걸까 아니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어이가 없었던 걸까. 약간 웃으며 누가 질문했냐고도 물어봤다. 차마 손을 들 수 없었다. 내 앞에 앉은 어떤 같이 온 일행분들이 하하호호하면서 좋은 영화가 어딨어 라고 말했던 것을 들었다. 익명으로 물어보았던 것이라 다행히 내가 그 질문을 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지금은 그게 무슨 책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난다. 그 강연자들과 내 주변에서 웃었던 사람들이 어떤 생김새였는지도 어떤 목소리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한 이미지만 기억날 뿐 자세한 건 흐릿하다. 다만 그 분위기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만은 또렷하다. 그게 싫어서 뛰쳐나오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던 책방에서 북토크가 있었는데 그 작은 일 때문에 그 책방을 좋아하던 마음도 식어버렸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이 자꾸 난다. 엄청나게 큰 사건은 아니었고 그 분위기가 아주 모욕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이따금씩 생각나곤 한다. 아마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고 부끄러움도 많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받는 연약했던 시기여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 질문에 대해 참 많이도 고민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고민한다. 매번 영화에 대한 평을 별로 표시해 남길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영화를 이 정도 별점으로 표현해놔도 되는 걸까?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보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그 사람에게는 명작인데 내가 낮은 별점을 매겨놓았으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그래서 영화에 대한 평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음에도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항상 빈칸으로 남겨만 뒀었다. 나의 생각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 같다.
그때도 그랬지만 아직도 주관적인 감정으로 별점을 매기곤 한다. 나에게 느껴지는 감동이 크면 점점 별점이 올라가는 식이다. 너무 감상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에게 와닿은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닐까. 단순 기록용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기준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된다. 3점은 정말 무난하고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들이 주로 포진되어 있다. 3.5는 조금 더 주제가 의미있거나 조금 더 큰 감정적인 파동이 올 때 매긴다. 약간의 생각을 해보게 하는 영화랄까. 4점부터는 왠지 모르게 쉽게 주기가 꺼려진다. 앞서 말했던 이유로 나의 취향으로 자리잡힐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면서 3.5점보다 더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들에 조금씩 4점 이상의 점수를 부여하고 있다. 5점을 잘 주지 않는 나를 별점 매기는 앱에서는 깐새우라고 표현하던데 내가 생각해도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난 좀 더 신중한 것뿐인데… 그렇게 신중하게 평가한 것이니 만큼 3.5 이상의 영화들은 친구들에게 추천해도 대부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최악의 영화들은 아니니까. 물론 시간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예전에 그 매겨놓은 별점들을 보면 다시 영화를 보고 다시 평가를 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런 나 자신이 약간은 어두침침한 방에서 본인의 속내를 말하지는 않지만 다만 대사와 연출로 말하는 내담자와 소통하려는 상담자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영화관에서든 내 방에서든 그 영화와 일대일로 마주앉아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나와 화면 속의 영화를 제3자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게 상담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영화와 나와의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때로는 치열하기도 한 대화.
상을 받는 영화가 좋은 영화일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추천해준 영화가 좋은 영화일 수도 있다. 내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깔깔거리며 웃은 영화가 좋은 영화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질문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 혹시나 나에게 들어온다면 나도 아마 내가 질문한 사람들처럼 사람마다 다르다고 답할 것 같다. 아무리 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영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최악의 영화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처럼 답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평론가가 한 강의에서 본인이 이렇게 영화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걸 듣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실제로 그 영화를 보고 본인이 느끼는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각자에게 그 영화가 가닿는 의미는 다 다를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조금 더 신중하게 그리고 어쩌면 결국 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라고까지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나의 가치와 신념과 아주 크게 맞닿아 있다. 그에 대해 어떤 글을 쓰느냐 하는 것도 그렇다. 아주 혼란스러웠던 그때는 어떤 방향으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지조차 몰랐다. 어쩌면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워 그걸 아주 멀리 밀어놓고 유보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도 아직 완벽하게 정립이 된 건 아니다. 한 영화를 보고 도대체 몇 점을 줘야 할지 손가락으로 별 몇 개까지 누를지 고민한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남겨놓은 평을 우연치 않게 보고 흔들릴 때도 있다. 저명한 사람이 이 영화가 좋다고 하면 나도 좋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고 별로라고 하면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보단 조금 덜 두려워졌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내 의견도 내가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 날것의 감정을 조금씩 들여다보면 결국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가 서서히 보인다. 그래서 그 시간이 꼭 필요하고 내가 느낀 감정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으니 그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직 그 영화와 나와의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나중에 다시 보면 새로운 국면에서 그 영화가 보일 수도 있다. 대신 그걸 마주하고 내뱉을 조금의 용기는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겪기 위해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영화를 보기 전에 최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것. 미리 알고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영화에 대한 첫인상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아주 깨끗한 상태로 새로운 영화를 만나려고 한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심히 기울여서 내가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야 내가 오늘 만나는 내담자인 영화,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나의 고민과 감정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주 변덕스럽기도 하고 어떨 때는 지루하고 짜증나기도 해서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들게 하지만 분명한 건 매번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아주 값진 경험을 하게도 해준다. 아직도 갈 길은 한참 멀었다. 영원히 이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것 같은데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평생 대화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아직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