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아지 2020. 12. 6. 22:14

 

가만한 (2020)

며칠 전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히 피아니스트 손열음 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하나의 노래를 계속 조성을 바꾸어 가며 치는 영상이었는데 클래식 음악을 잘 듣지 않는 나로서는 어릴 때 CD로 아주 유명한 클래식 음악만 돌려 듣던 기억밖에 없어서 간만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배우고 쳤지만 그 이후로는 어쩐지 계속 치지는 않게 됐다. 저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니다가 고학년이 되면서 피아노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배우게 되면서부터 피아노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던 것 같다. 아직도 피아노 선생님이 연습하라고 표시해 둔 동그라미를 대충 채웠으면 어떻게 바로 아시고 혼을 냈던 기억이 난다. 연습을 제대로 안했다는 티가 바로 났나 보다. 물론 나의 잘못도 있겠지만 굉장히 호랑이 같은 엄격한 선생님이셨다. 이제는 조금 시간이 흘러서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피아노 수업 시간이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었던 건 확실하다. 언제는 한 번 내가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쉰다는 게 선생님께는 한숨으로 느껴졌는지 그렇게 숨을 크게 쉬면 한숨처럼 들리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또 악보를 볼 때는 지금 손으로 치고 있는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칠 부분을 미리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연습을 잘 해와야 그것들이 탄탄하게 쌓여서 잘 칠 수 있게 된다고도 하셨다.

이렇게 꾸중 듣고 주눅들었던 기억도 많지만 연습을 열심히 해왔을 땐 확실히 칭찬도 해주셨다. 몇 번 대충 한 것이 들통나고 나서는 선생님께 혼나기 싫어서 동그라미를 열심히 채우면서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덕분에 피아노 실력이 조금 더 늘 수 있었다. 작지만 연주회도 했었고 거기서 나름의 뿌듯함을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피아노가 재밌거나 즐거워서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워서 어느 정도 성취감도 있고 뿌듯함도 있었지만 중학생이 되고서부터는 계속 치고 싶지는 않았다. 간간히 취미로 치는 것 빼고는.

어렸을 때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거기서 잘하는 친구들은 콩쿨에도 나가서 상도 받지만 그 사람들 중에 피아노를 전공으로 삼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다. 어제 우연히 집에 있는 책장을 보다 우리 오빠가 예전에 콩쿨에 나가서 받아온 트로피를 발견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였는데 지금은 피아노를 치는 오빠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때는 상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아주 못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니까 조금 신기했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왜 다들 어느 시기가 되면 그걸 놓아버리게 되는 걸까.

유튜브 추천 영상을 따라 손열음 님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는 영상도 보게 되었다. 그 음악을 들으면 달빛이 비치는 호수를 걷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평온해지고 잔잔해진다. 음악처럼 건반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면서 얼마 전 영화제에서 온라인으로 상영했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손모아, 안정연 연출•촬영의 <가만한>이라는 영화다. 영화 제목처럼 카메라는 아주 가만히 인물들을 지켜본다. 정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이 다소 답답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내가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가서 졸았던 것처럼 너무 잔잔하고 평화로웠던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또한 내가 그 고요해보이는 음악에서조차 고조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걸 관심있게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런 태도를 꼬집기라도 하는 듯 처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앞서 말한 태도를 고수한다. 가만해 보이는 것들의 미묘한 변화와 그 안에서도 분명히 느껴지는 소용돌이를 감지하려면 아주 가만히 오래도록 그들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을 성실하게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미덥고 따뜻하다.

그런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은 어떤 이유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아파보이는 손을 자주 만지작거리면서도 음악소리가 계속 맴도는 곳에서 떠날 수 없는 준서와 피아노를 계속 치면서 소리를 직접 만들어내면서도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고 본인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하는 화원이다. 음악을 포기하는 혹은 자연스럽게 놓아버린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두 주인공 중에서도 이 영화 속의 준서가 자꾸만 떠올랐다. 준서가 음악을 다시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 주변에는 흐르는 물소리처럼 피아노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음악을 향해 가닿고 싶어하나 중심부로 가지 못하고 파동이 일어나는 부분만 준서는 걷는 것 같아 보인다. 영화는 그런 준서가 머무는 공간, 준서의 뒷모습, 눈빛, 표정 등을 꾸준하게 담아낸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피아노와 자연스럽게 멀어져버리게 된 과정과 이렇게 나처럼이 아니더라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길을 놓아버리게 된 사람들, 언제고 가만한 음악 소리를 들으면 다시 그 기억과 추억이 소환되는 많은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그들을 천천히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선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주저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보여도 고요하게 바라보면 그들의 아픔과 상처가 보일 테니. 그들이 겪어낸 소용돌이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테니.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놓아버렸지만 자꾸 그 주변을 맴돌면서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고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눈빛까지도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