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아지 2020. 11. 20. 23:03

 

1. 학교를 다니면서 혹은 어떤 프로젝트를 참여하면서 야금야금 써놓은 글들을 요즘 하나둘씩 온라인에 꺼내고 있다. 잠들어만 있던 글이었어서 그냥 그렇게 가만히 썩혀두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불특정다수가 볼 수 있는 블로그에 올리려니 조금 민망하긴 하다. 많은 사람이 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와 이웃을 맺은 블로그 친구들은 볼 수 있게 된다. 나만 볼 수 있던 글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신경쓰여 올리기 전에 한 번 글을 훑어본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런 글도 썼구나 싶다. 내 머리와 손에서 나온 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색하고 다른 사람의 글 같다. 나에게서 나온 나의 일부인 동시에 내가 바깥으로 내보내면서 독립적으로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을 존재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나의 고민과 상태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내가 지나온 흔적이지 않을까. 예전에 쓴 글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 쓴 글들도 분명 나중에 보면 생소할 텐데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해졌다. 내가 어느 특정 시기에 쓴 글들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 글의 단순한 총합이 나라는 사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조각들이 나에 대한 일부분의 진실은 말하고 있을 것이다. 글 뒤로 숨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에는 생각보다 많은 진실이 담기게 마련이니까. 과거의 나를 돌아볼 때 나에 대한 진실이 조금 더 잘 보이도록 지금 진심을 담아 성실하게 글을 쓰고 싶다.

 

2. 쌓아놓은 글들을 조금씩 공개하면서 누구라도 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쌓아놓은 글통장에 잔고가 비어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뭔가 든든하게 쌓아두고 비상용으로 꺼낼 수 있는 글들을 쟁여두고 싶은데 점점 전 재산(?)이 털리는 기분이다. 앞으로 더 많이 써서 채우면 되겠지만 사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조금 더 용기와 힘을 내서 지금까지 쌓은 글보다 더 좋은 글, 그리고 더 많은 글을 쌓고 싶다. 통장에 있는 돈도 가만히 고여있기만 하면 더 큰 돈을 불러오지 못하는 것처럼 글도 가만히 그 자리에만 있으면 더 좋은 글을 불러오지 못할 것이다. 옛날 글들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글들이 들어와야 글통장이 건강하게 순환될 수 있을 것 같다. 

 

3. 가수들이 신보를 들고 나올 때마다 앨범에 실리지 못한 수많은 곡들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선택되지 않았을 곡들. 대중성이 부족하다거나 이번 앨범의 컨셉에는 맞지 않는다거나 완성도가 부족하다고 느낀다거나 본인에게 너무 소중해서 아직은 공개하고 싶지 않다거나. 이런 이유들로 잠들어 있는 곡들이 가수 본인에게 어쩌면 큰 위안거리 혹은 자신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내가 모아둔 글들에 글통장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어제 읽은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에서 “일상을 다 노출하는 사람은 영혼이 껍데기가 되는 것 같다. 비밀을 많이 간직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발견했다. 글을 공개하는 것과 일상을 다 노출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에서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어찌 되었든 모든 걸 공개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너무나 소중해서 나만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에겐 아직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소중한 마음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 보니 아직 그런 이야기는 나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인터뷰를 읽으며 나도 글통장에 나만 아는 비밀을 소중히 품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