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몸
올해 정말 미스터리한 것이 있다.
나는 원래 일년 혹은 분기별로 꼭 한 번씩은 감기에 걸린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감기에 걸리지 않은 해를 꼽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일년 혹은 특정 기간을 잘 살아냈다는 의미로 내 몸이 통과의례를 거치듯 한 번씩 앓고 지나가는 것 같다. 롯데월드 하루 다녀왔을 뿐인데 그날 아주 신나게 놀아서 몸살감기에 걸린다거나 아주 힘들었던 학기를 마치고 나서 피곤이 쌓여 열이 펄펄 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기 전 캐나다에서 몇 개월 지낼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돌아온 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그게 벌써 작년 5월이다. 그러니까 5월에 입국한 후 아직까진 멀쩡하게 살고 있다는 거다. 더 놀라운 것은 캐나다에서 약 4개월 정도 머무를 때는 두 번 정도나 감기를 앓았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혹독한 추위로 면역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북미의 환경이 내 몸과는 맞지 않았나 보다.
올해 감기나 몸살로 앓지 않는 건 아마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꼬박꼬박 쓰고 다녀서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기존 호흡기 질환 같은 것들이 예년보다 훨씬 줄었다고 하니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다. 마스크가 코로나 예방뿐만 아니라 다른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내 몸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정신적인 마음상태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캐나다에서 사는 동안 나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내가 캐나다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비교해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같이 캐나다에 갔던 언니의 말대로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흘러가는 일상을 유예하고 캐나다로 도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한국에서 있었던 시간을 많이 돌아보고 앞으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런 시간을 가진 후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니 내가 하고자 마음 먹은 일이나 관심 있는 일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겠다는 다짐과 아주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귀국 후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몸은 바쁘긴 하지만 그리고 자잘한 걱정거리들은 있지만 그렇게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조금은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정신적인 상태와 몸의 연관성을 얘기하자니 몇 년 전에 읽었던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이 책은 고용 불안, 보이지 않는 차별이나 혐오 등의 사회적 상처가 실제로 어떻게 우리의 몸을 아프게 하는지를 담고 있는 책인데 정신과 마음이 정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몸은 정직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으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지 몸에 나타난다. 나도 살면서 몇 번씩이나 경험했던 말이기 때문에 특히나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서 올해는 아직 내 몸이 버텨낼 수 있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말로 주절주절 풀어내면 말의 주술 효과라는 것이 있어서 혹시나 곧 아프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가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는 지속되어서 건강하게 할 일을 하며 지냈으면 한다.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라는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도 이로 인해 딸려오는 다른 상황들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코로나 시대에 집에 머물면서 나름 안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른 사태가 마무리되고 또 그에 맞는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어서 모두가 건강한 2020을 마무리하길.